오랜만에 대학교 시절에 다녔던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날 설교 말씀을 통해 별무리학교에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아이들을 품는 교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이 은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설교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장 8절.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이 표현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라는 권면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사모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심장은 어떻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달로 ‘심장이식’ 수술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장이식 수술이란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죽은 사람의 건강한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입니다. 심장이식을 받는 환자는 대게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못하면, 1년 내 사망률이 30-70%인 환자입니다.
최초 심장이식수술은 1967년 남아공에서 성공되어 심장이식을 받은 사람이 18일 동안 생존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기술이 발달하여 현재는 1년 이상 생존률이 84% 이상으로 늘었답니다. 이제 심장이식 수술로 남의 심장을 이식 받아 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비유컨대 바울은 영적인 차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심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살 수 없어서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심장의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심장이식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심장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우리 심장으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심장 그 깊은 곳에 사랑을 담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배우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애쓰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마음에 품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과 발로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한 뒤 달라졌습니다. 그 심장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담아 두신 사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품고 머리로 생각하고 손과 발로 행동하는 것들에서 사랑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의식하고 힘쓰고 노력해도 사랑이 잘 안됩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심장이식수술입니다.
우리의 심장을 예수의 심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이식 받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품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첫째, 불쌍히 여기는 심정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여러 사역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역들의 출발 동기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막 6:34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사역의 현장입니다. 그 동기가 바로 불쌍히 여기시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려 할 때 사람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려는 심정으로 할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눅 7:13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적의 현장입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사역의 동기 역시 불쌍히 여기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이적을 베풀려고 할 때 사람들에게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적 이후 무엇인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품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쟁하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무관심하고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희생하는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음속에 담아 두셨던 심정은 하나입니다. 그 심정이 바로 요 12:24절에 나타나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기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바로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심정입니다.
말알의 심정은 바로 희생하는 심정입니다. 바로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이 밀알의 심정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밀알의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심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밀알의 심정, 희생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심장을 이식해야 합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의 심장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불쌍히 여기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희생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 별무리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아이들을 품을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자녀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부모님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거짓없는, 성실하신 사랑.
교육은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 하나로 충분합니다.